하늘빛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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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를 아끼고 싶어도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TV의 전력소모를 줄이고 싶다면 저전력 TV를 구입하면 됩니다. 인터넷에서 제원을 잠깐만 들여다보더라도 제품의 소비전력 및 대기전력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전력소모나 친환경 관련 인증을 확인하는 것으로 믿고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TV의 단짝이 된 셋톱박스(물론 안테나를 통해 지상파를 직접 수신하는 경우엔 필요가 없습니다.)는 그렇지 못합니다. 셋톱박스는 설치 기사가 건네주는 걸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셋톱박스도 한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고, 저전력형 제품도 있다고 합니다.주1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려는 제품이 저전력형인지, 아니면 대기전력으로 시간당 10W이상을 퍼먹는 전기먹는 하마인지 따져볼 기회마저 없습니다.

이것은 고객이 선택할 기회를 박탈한 기업의 직무유기이기도 하지만, 통신사 간 과다경쟁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LTE폰이 보급된 관계로 가구당 전체 통신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인터넷과 IPTV같은 유선망 쪽은 물가 대비 상당히 저렴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서 가입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약정을 걸면 현금을 선지급하는 식으로 과다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신사를 바꿀 경우엔 으레 셋톱박스도 바꾸게 되어있습니다. 현재로선 통신사 간에 통일된 규격같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규가입의 경우엔 초기에 셋톱박스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통신사 간 경쟁으로 인해 초반에 많은 현금을 지급해줘야 합니다. 따라서 통신사로서도 초기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톱박스가 느리고 전기 또한 많이 잡아먹는다고 해도 새로운 셋톱박스를 개발하는 데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또 기계 단가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성능 및 전력소모를 개선시킬 비싼 부품들을 대거 투입할 수도 없습니다.

셋톱박스들도 이녀석처럼 세련되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셋톱박스들도 이녀석처럼 세련되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셋톱박스에서 지금도 많은 양의 전기가 줄줄 새나오고 있는데, 기업이 비용문제로 난색을 표하는 동안 고객들은 영문도 모르고 추가로 전기요금을 더 내고 있는 셈입니다. 위에 링크한 기사에 따르면 대기전력이 시간당 17.39W에 달한다고 하는데, 하루 24시간 켜놓는다는 걸 감안하면 일반적인 형광등보다 더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셈입니다.(보통 형광등을 24시간 켜놓진 않으니까요)

게다가 하루 종일 켜놓는 게 셋톱박스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리모콘 버튼 하나로 TV를 켜서 즉시 보고싶기 때문에 셋톱박스를 켜두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셋톱박스는 물론 이게 물려있는 공유기같은 장비들도 줄줄이 켜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톱박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전력소모가 더해지는 셈입니다.(게다가 이런 장비들은 대기모드가 아니라 실제로 가동중입니다.)

그러면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TV를 껐다 켤 때마다 공유기와 셋톱박스의 전원을 켜고 1분씩이나 되는 부팅시간동안 무미건조한 로딩화면을 쳐다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할까요? 물론 그게 대기전력조차도 완벽히 차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21세기에 그런 구식 수단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전력소모를 줄이면서도 성능을 끌어올린 신형 셋톱박스를 개발하면 됩니다. 물론 한 푼이 아쉬운 통신사는 그럴 여력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새 정부가 하지 말래도 잘 하는 게 있죠? 개방입니다. 통신사가 셋톱박스 개발부터 유통까지 다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마치 자급제폰처럼 셋톱박스도 사용자가 알아서 사오게끔 하고, 통신사는 그걸 이용한 서비스만 제공하면 됩니다. IPTV도 결국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같은 것이고, 셋톱박스는 그 서비스를 구동하는 소형 컴퓨터라고 할 수 있으니, 자신들의 서비스를 지원할 수 있는 규격의 제품을 만들도록 유도해서 고객들이 그 제품을 사게 하면 됩니다. 전력소모 문제나 성능 문제는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봅니다.(태블릿같은 것만 봐도 비싼 게 여러 기능이 달려있고 좋지만 전반적인 성능은 저렴한 제품도 크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까지 왔으니까요)

 

(추신:좀 더 찾아보니 이미 제 생각에 부합하는 셋톱박스가 나와있습니다. http://www.ddaily.co.kr/news/article.html?no=110974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제품인데, 통신사 구분 없이 앱 설치를 통해 IPTV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게 가능해진다면 시장에 염가의 좋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올텐데, 대신 pooq같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와 경계가 모호해지게 될테니 통신사로서는 밥그릇 보호를 위해 쉽게 그러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최후에는 둘이 한몸이 될 것 같습니다. 흐름을 잘 읽고 고객과 자신들을 위해 현명한 판단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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