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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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 스탠다드 14K 블랙 만년필 개봉기

왜 하필이면 이 제품을 질렀을까요?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지른 만년필 개봉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노트필기용으로 세일러 프로피트 영(EF닙)이라는 극세필을 자랑하는 만년필이 있었는데,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죽창보다도 날카로워서 종이를 찢어놓곤 했습니다. 물론 평소에 필기구를 꾹꾹 눌러 쓰던 제 잘못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 녀석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첫 만년필이라 이것저것 분해해보기도 하고 관리도 소홀했거든요) 대체할 만년필이 필요했는데, 마침 팔리지 않던 헤드폰이 팔리게 되어 15만 원을 최대 예산으로 만년필을 찾아보았습니다.

처음에는 10만 원대 가격대에선 이보다 멋질 수 없는 파버카스텔의 엠비션이나 이모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크롬도금된 금속제 뚜껑과 원목 몸통의 조합은 정말 괜찮았지만, 필통에 넣어서 쓸 생각이었고, 이모션 제품의 경우엔 특성상 그립부에 흠집이 많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해서 다른 제품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제품은 펠리칸의 M200이었습니다. 플런저 방식이라 잉크가 많이 들어가는 데다가 같은 방식의 상위 제품군보다 가격이 상당히 저렴하다는 점 때문에 고시생 만년필로 유명한 제품입니다. 그래서 만년필을 산 당일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이 녀석으로 잠정 결정을 한 상태에서 교보문고 만년필 매장에 갔습니다. 거기서 M200을 꺼내 시필을 해봤는데, 역시 듣던 대로 필기감이 부드러웠습니다. 다만 너무 부드러운 나머지 서걱거리는 느낌을 좋아하는 저에겐 조금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나 봅니다. 게다가 펠리칸의 F닙은 첫 만년필을 일본제 EF닙으로 시작한 제게 있어서 너무 두꺼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접고 마침 땡처리하고 있던 이번 개봉기의 주인공, 플래티넘 스탠다드 14K 제품으로 돌아섰습니다.

기왕 서울에 왔으니 그대로 돌아가긴 뭐해서, 땡처리하는 사이트의 오프라인 매장에 들렀습니다. 사실 이 제품을 산 것도 오프라인 매장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만년필은 오프라인 매장을 가진 독립 사이트 가격이 쇼핑몰 최저가보다 비쌌지만, 이 제품은 그 반대였습니다. 30% 세일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14K 금닙이 들어간 만년필을 단돈 5만 원대에 살 수 있었습니다. 시필을 해서 F닙이 적당한 걸 확인하고 버건디 색상으로 사려고 했는데, 버건디는 F는 쏙 빼놓고 EF와 M닙 제품만 있었습니다. 별수 없이 F닙 블랙 제품으로 샀습니다.


드디어 진짜 개봉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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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에 걸맞은 심심하고 저렴한 포장입니다. 어차피 쓰는 것은 알맹이뿐이니까 나머지는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물용으로 사는 분들은 따로 포장을 하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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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용 케이스입니다. 역시 저가형 제품답게 심플하고 심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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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넘 스탠다드의 겉모습입니다. 그냥 딱 봐도 만년필처럼 생겼습니다. 아주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에 적당한 두께라 양복이나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쓰기엔 좋아 보입니다. 다만 손이 큰 남자분들은 장기간 사용 시 손이 아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비교하려고 나란히 놓아둔 세일러 프로피트 영하고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일본산 보급형 제품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나봅니다. 그래도 여기저기에 금도금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플래티넘 스탠다드 쪽이 아주 조금은 더 멋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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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 입구 쪽은 금테가 둘러져 있고, 그 위에는 역시 금도금으로 자기 출신 성분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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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촉입니다. 금도금이 아닌 진짜 14K 펜촉입니다. 중국산 제품이 출동하지 않는 한, 이보다 더 저렴한 금촉 제품은 구하실 수 없을 겁니다. 단돈 59,000원이니 말입니다.주1. 그래도 가격에 걸맞게 촉에는 별다른 음각 장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품 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만 봤을 때는 정말 없어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굉장히 심플하니 좋았습니다주2. 펜촉이 다른 제품에 비해 폭이 좁은 편주3이라 다른 무늬가 없는 편이 좋아 보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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닙의 뒷면은 더 심플합니다. 다른 브랜드들은 비슷한 가격대의 제품에도 잉크 흡입용 홈을 여럿 파 놓아서 좀 더 쉽게 잉크를 채울 수 있게 해 놓았지만, 금닙에 모든 힘을 다 쏟은 모양인지 잉크 흡입구는 저기 직사각형 부위 한 군데뿐입니다. 그래도 요령이 생기면 저 크롬 코팅된 몸통 끝 부분에 닿지 않은 채로 잉크를 채울 수 있으니 크게 문제 되는 점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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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지를 넣어서 쓰는 편이 더 깔끔하고 간편하긴 하지만 카트리지는 용량에 비해서 비쌉니다. 사은품으로 카트리지 충전용 스포이트같은 것을 주긴 했는데, 별로 폼이 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만년필은 잉크병에 촉을 담그고 꽁지를 돌려서 채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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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함께 제공되는 컨버터가 너무나도 영롱합니다. 이런 곳에까지 금도금해서 깔맞춤을 해놓았습니다. 어차피 안 보이는 곳이니까 부담스럽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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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잉크도 같이 샀습니다. 처음에는 기존에 쓰던 세일러 젠틀 블랙 잉크를 계속 쓰려고 했는데, 그 잉크는 안료가 들어간 제품이라 다른 색의 잉크를 갈아 넣으며 쓰기에 부담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노트필기용으로 부담 없는 블루블랙 잉크를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해당 잉크로 필기해서 색을 확인할 수 있는 차트를 본 후에 펠리칸 4001 블루블랙 잉크를 선택했습니다. 직원에게 꺼내달라고 해놓고 보니 이 잉크가 닙을 부식시킨다는 정보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산 만년필이 금닙이라 상관없어서 그냥 샀습니다. 배럴 끝 부분의 크롬 도금된 부위에만 닿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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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사세요, 땡처리 기간에만…

가장 저렴한 금닙 제품이라는 점은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그래서 금닙이면 어쩔 건데?”라고 물으면 왜 금닙이라 좋은지에 대해서 대답을 못 하는 제품인 것 같습니다. 금닙이라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닌 모양인듯하니까요. 그래서 정가 기준으로 비슷한 가격대의 스테인리스닙 제품과 비교해서 딱히 더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세일을 하는 경우에는 역시 좀 평범한 디자인과 미흡한 마감의 제품이라도 “이 가격에 금닙을 살 수 있다니!” 하면서 충동구매를 할 만한 가치는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주:

  1. 예전엔 5만 원 선이 붕괴한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ㄷㄷㄷ
  2. 어쨌든 진짜 금이니까요.
  3. 재료비를 아끼려는 의지의 표현이랄까요.

CC BY-NC 4.0 This work is licens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 4.0 International License.

  • 플레티넘 만년필은 아직까지 땡끼지가 않아… 난 독일 메이커 만년필로 처음 생활해서 그런가…ㅎ 현재 갖고 있는 만년필은 죄다… 독일메이커… 심지어 같은 메이커 제품만 3개..ㅋㅋ 만년필에 빠지면..불편해도… 다른 필기구를 보지 않게 되는게 단점이랄까..ㅋㅋㅋ

    • 저도 불편하지만 만년필로 쓰고 있어요.
      사실 플래티넘 스탠다드 구입하기 전에 세일러 프로피트 영을 썼고 지금은 플래티넘 #3776 센추리를 쓰고 있어요.
      센추리는 아베가 엔저로 발악하고 원화가치가 지금보다 높았던 작년 가을에 라쿠텐 직구로 싸게 사서 잘 쓰고 있어요 ㅎㅎ